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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과일이요— 단내 나는 복숭아 있어요!”
달달한 외침이 골목을 가득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오던 아이는 수레 위에 놓인 딱지붙은 귤 한 봉지 앞에서 발길을 멈췄고, 어머니는 손끝으로 감을 눌러가며 익은 정도를 살폈다.
과일장수.
이들은 단순히 과일을 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계절의 순환을 전하고, 거리의 풍경을 색으로 채우던 이동형 장인이었다. 사계절 내내 수레 위에 얹힌 과일들은 그 시기의 풍요로움과 인간의 노동이 결합된 결과였고, 과일장수는 시간과 감각, 기술이 만나는 자리에 선 사람들이었다.
이 글은 과일장수라는 잊혀진 직업이 어떠한 노동을 담고 있었으며, 어떻게 사라져갔고, 그들이 거리 문화와 소비 문화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과일장수란 누구였는가?
2.1 고정된 가게 없이 이동하는 장사꾼
과일장수는 트럭, 리어카, 손수레 등을 이용해 동네 골목, 시장 입구, 학교 앞, 공터 주변을 돌며 계절과일을 팔던 이동형 자영업자였다. 정해진 장소나 시간표 없이,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장터가 되었고,\ 그들의 외침이 닿는 곳이 곧 영업장이었다.
2.2 구성과 특징
주로 중장년 남성 또는 부부 단위, 새벽마다 가락시장, 노량진시장 등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떼어와 정리·세척·포장 후 거리 판매하였다. 이들은 특정 회사나 협회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공식적 자영업 구조 안에서 생계를 꾸려가던 서민형 유통인력이었다.
3. 과일장수의 손끝 노동 – 단순 판매를 넘어선 기술
3.1 눈과 손, 후각으로 완성되는 상품 선정
과일장수의 노동은 ‘파는 것’ 이전에 ‘고르는 기술’에서 시작된다. 사과의 단단함, 복숭아의 향, 포도의 송이 구조, 귤의 당도와 껍질 두께 등을 눈과 손으로 선별해야 했다. 시장에서 상품을 고르는 능력은 직업경력, 계절 감각, 거래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곧 과일장수의 신뢰와 생존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
3.2 포장과 진열 – 색채의 배치와 감성의 미학
수레 위에 과일을 어떻게 올려놓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졌다. 복숭아는 높게, 수박은 바깥쪽에, 색이 대비되는 과일을 교차 배치, 상태 좋은 과일은 전면, 흠집 난 과일은 묶음으로 후면 이러한 배열은 단순한 진열이 아니라 거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색채의 미학, 시각적 판매 전략이었다.
4. 과일장수가 만든 거리 풍경과 소비 문화
4.1 골목 속 작은 계절 통신사
사계절이 반복되던 과거, 계절이 바뀌었음을 처음 알리는 존재는 달력도 뉴스도 아닌 과일장수의 수레였다.
- 봄: 딸기, 참외
- 여름: 수박, 복숭아
- 가을: 감, 배, 밤
- 겨울: 귤, 사과
그들은 과일을 팔면서 계절을 팔고, 시기를 알리며, 동네 사람들의 계절 감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매개자로 기능했다.
4.2 소소한 공동체의 교류 장소
과일 수레 앞은 단순한 구매 장소가 아니었다.
- 이웃 간의 안부 인사
- 아이와 엄마의 작은 흥정
- “어제 거 참 달았어”라는 고객의 평
이런 장면들은 전통적 상거래를 넘어서 관계적 소비와 정서적 유대가 오가는 작은 광장이었다.
5. 왜 사라졌는가?
5.1 유통 구조의 대형화와 규격화
1990년대 이후 대형마트와 체인형 슈퍼마켓이 확산되며 도매 직송, 대량 구매, 규격 상품 유통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작은 단위의 이동 상인들이 유통에서 배제되었고, 신뢰보다는 브랜드와 포장이 우선시되는 구조 속에서 과일장수의 설 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5.2 법적 규제와 도시환경 변화
- 노점상 단속 강화
- 리어카의 도로 점유 문제
- 보행 환경과 도시 미관 개선 정책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사실상 거리 위에서 과일을 팔 수 있는 물리적 공간 자체를 없애는 조치였다. 도시는 깔끔해졌지만, 이동형 생계의 자리는 함께 사라졌다.
6. 과일장수가 남긴 문화사적 의미
6.1 노동의 감각화 – ‘손맛’의 유산
과일장수는 기계나 계산이 아닌 눈, 손, 코, 경험으로 상품을 판단하고 구성했다. 이들은 노동의 정밀성과 정서적 직관이 결합된 전통적 유통인의 상징이며, 빠르게 사라진 ‘손끝의 노동’이 예술이 되던 시대의 대표적 예였다.
6.2 정서적 교류의 실종
과일은 여전히 먹지만, 이제 누군가의 말과 눈빛, 손끝으로 고른 과일은 접하기 어렵다. 길거리 과일장수는 단순한 판매원이 아니라 고객의 안색을 살피고, 가족 구성까지 고려하며, 그날 가장 잘 익은 과일을 권하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상품을 팔면서 관계를 쌓았고, 도시에서 사람 냄새 나는 유통을 실현했던 마지막 세대였다.
7. 결론 │ 거리에서 계절을 나르던 손끝, 이제는 기억 속으로
이제는 어디에서도 골목 어귀에 앉은 과일장수를 보기 어렵다. 소형 트럭 대신 온라인 마켓, 수레 대신 배달 앱이 일상을 차지한 시대.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계절을 맛보았고, 도시의 골목이 살아 숨쉬었으며, 누군가의 손끝에서 전달되는 작은 배려와 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라졌지만, 과일장수는 여전히 손으로 일하던 시대의 정서,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인간을 연결했던 상인의 정신, 그리고 계절과 삶을 함께 나누던 감각적 공동체의 상징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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